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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菟郡의 변천과 對고구려·부여 관계-제2현도군과 제3현도군에 대한 검토를 중심으로-A Change of Xuantu Commandery(玄菟郡) and Relationship of Xuantu Commandery with Goguryeo and Buyeo

Other Titles
A Change of Xuantu Commandery(玄菟郡) and Relationship of Xuantu Commandery with Goguryeo and Buyeo
Authors
이승호
Issue Date
Apr-2022
Publisher
고조선단군학회
Keywords
Xuantu Commandery(玄菟郡); Chaekguru(幘溝漊); Goguryeo; Buyeo; 현도군; 책구루; 고구려; 부여
Citation
고조선단군학, v.47, no.47, pp 197 - 236
Pages
40
Indexed
KCI
Journal Title
고조선단군학
Volume
47
Number
47
Start Page
197
End Page
236
URI
https://scholarworks.dongguk.edu/handle/sw.dongguk/3343
DOI
10.18706/jgds.2022.4.47.197
ISSN
2765-6462
Abstract
이 글은 기원전 75년 무렵 蘇子河 방면으로 옮겨 간 ‘제2현도군’과 그 뒤 다시 渾河 방면으로 옮겨 설치된 ‘제3현도군’에 대해 검토한 것이다. 특히 제1현도군으로부터 제2, 제3현도군으로 이어지는 현도군의 변천 과정에 따라 현도군과 고구려ㆍ부여의 관계는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검토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현도군의 첫 번째 이동을 초래한 “夷貊所侵”은 지금까지 原고구려 사회가 주도하였던 것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여기서의 “夷貊”을 과연 고구려로 특정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기원전 75년 무렵 제2현도군이 설치된 이후로도 고구려와 현도군은 기원 전후 시기까지 원만하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기원 전후 무렵 3개의 屬縣만을 거느렸던 제2현도군의 호구수가 45,006戶, 221,845口에 달하였던 사실은 당시 현도군이 파악하고 있던 인구 집단에 고구려 사회의 주민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암시한다. 즉, 적어도 元始 2년(A.D. 2) 무렵까지는 현도군과 고구려가 朝服ㆍ衣幘과 名籍의 교환을 바탕으로 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때 고구려로부터 인구 상황을 비롯한 고구려 사회의 내부 정보가 현도군에 전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원후 1세기 초 이후로 양측 간에 군사적 충돌이 발발하면서 고구려와 현도군의 우호 관계는 폐기되었다. 현도군은 책구루 설치를 통해 기존의 관계를 형식적으로나마 지속하기 바랐지만, 1세기 말 혹은 2세기 초 무렵 현도군이 고구려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붕괴하면서 그 東界에 설치된 책구루 또한 철폐되었다. 그러자 後漢은 106년에 제3현도군을 재건하고 渾河 유역 교통로를 중심으로 屬縣을 포진시켜 고구려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였다. 이후로 고구려와 현도군은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으며, 특히 이 시점에 이르면 북방의 부여 또한 현도군의 편에 서서 고구려에 대한 견제에 나섰다. 당시 부여는 남쪽에서 무섭게 세력을 확장하던 고구려를 제어할 필요가 있었고, 이에 현도군과 군사적 연대를 통해 양면에서 고구려를 압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공세에 현도군은 계속적으로 수세적 입장에 놓일 수밖에 없었고, 그러자 부여 또한 약화된 현도군을 향해 공세를 취하는 등 대응을 다변화하였다. 이후 2세기 후반 遼東에 公孫度이 자리를 잡고 세력을 확대해가면서 정세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는데, 公孫度의 宗女와 夫餘王 尉仇台의 결혼을 통해 긴밀한 관계를 형성한 양자는 곧 함께 고구려에 대한 견제에 나섰다. 그러나 이 무렵 公孫氏 정권은 요동군을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하였기에 그간 고구려ㆍ부여와의 관계를 전담하였던 현도군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또 현도군은 오랜 기간 고구려ㆍ부여의 공세와 압박을 받아 왔던 탓에 그 郡勢도 상당히 위축된 상태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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