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毌丘儉紀功碑」의 해석과 高句麗·魏 전쟁의 재구성Stele of Guanqiu Jian’s inscribed achievements and the Goguryeo–Wei War
- Other Titles
- Stele of Guanqiu Jian’s inscribed achievements and the Goguryeo–Wei War
- Authors
- 이승호
- Issue Date
- Dec-2015
- Publisher
- 한국목간학회
- Keywords
- 毌丘倹; 毌丘倹紀功碑; 毋丘倹; 毋丘倹紀功碑; 東川王; 관구검(毌丘儉); 관구검기공비(毌丘儉紀功碑); 무구검(毋丘儉); 무구검기공비(毋丘儉紀功碑); 동천왕(東川王)
- Citation
- 木簡과 文字, no.15, pp 15 - 44
- Pages
- 30
- Indexed
- KCICANDI
- Journal Title
- 木簡과 文字
- Number
- 15
- Start Page
- 15
- End Page
- 44
- URI
- https://scholarworks.dongguk.edu/handle/sw.dongguk/25293
- ISSN
- 2005-4122
- Abstract
- 잘 알려져 있듯이 「毌丘儉紀功碑」에는 正始 5~6년(244~245)에 걸쳐 진행된 고구려와 曹魏의 전쟁 상황을 전하고 있다. 한편 같은 사건을 전하는 여러 사서에서는 당시 두 나라의 전쟁 시점을 正始 5~6년(244~245) 또는 正始 7년(246)의 일로 각기 다르게 전하고 있는데, 이에 학계에서는 비석의 내용을 바탕으로 전쟁이 正始 5~6년(244~245)에 일어났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각각의 사서에서 같은 사건에 대해 그 시점을 서로 다르게 전하는 이상 사료 상에 그처럼 차이가 나타나게 된 원인은 무엇인지 해명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毌丘儉紀功碑」와 현전하는 관련 문헌사료를 종합적으로 재검토하여 3세기 중엽 진행된 高句麗와 曹魏 간에 벌어진 전쟁의 경과를 복원해보고자 하였다.
먼저 근래 답사를 통해 확보한 「毌丘儉紀功碑」 실물 사진자료에 대한 분석과 魏晉時代 圭首碑의 形制에 대한 검토를 바탕으로 비석 원형을 대략 높이 85cm, 넓이 30cm 크기에 총 7행으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새롭게 파악된 비문의 구성과 내용을 통해 비석은 正始 6년 5월에 魏軍이 제작한 戰功碑였으며, 곧 244년 개시된 전쟁이 245년 5월 마무리되었음을 전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구체적으로 비문의 2행과 3행의 내용은 曹魏의 1차 침공 당시 관구검의 군대가 환도성을 함락한 다음 다시 회군하는 정황을 전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다음으로 현도태수 왕기의 공격으로 알려져 있는 曹魏의 2차 고구려 침공의 시점과 그 배경을 다시 검토함으로써 여러 관련 사료에서 서로 다르게 전하는 전쟁 과정과 기간에 대한 혼란을 바로잡고 사건을 보다 명확히 이해하고자 하였다. 검토한 바 『삼국지』 관구검 열전이나 여타 문헌에 보이는 245년의 2차 침공은 245년 8월에 시작되어 246년 2월 무렵 종결되었던 것으로 결론 내릴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전쟁이 정시 7년(256)에 일어난 것으로 전하는 사료들은 전쟁의 종결 시점에 맞추어 기사가 기입된 것일 뿐 오류로 볼 수 없다는 점도 확인하였다. 또한 그간 신빙하기 어려운 자료로 인식되어 왔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20년 조의 전쟁 기사를 새롭게 파악할 수 있었는데, 당시 남옥저 지역에서 벌어진 고구려군과 위군의 전투는 동천왕의 군대와 낙랑태수 유무가 이끄는 낙랑군 병력이 충돌한 것으로 판단된다.
결국 244년 관구검군의 고구려 침공으로 시작된 高句麗와 曹魏의 전쟁은 246년 2월까지 3년 간 지속되면서 유주자사 관구검의 지휘 아래 曹魏의 군대가 고구려를 전방위적으로 압박해 들어갔던 사건이라 볼 수 있다. 즉 현도태수 왕기의 군대는 환도성을 거쳐 북옥저 일대로,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의 군대는 영동의 예 지역으로 동시에 각기 길을 달리하여 고구려를 침공한 것이라 판단된다. 이로써 당시 曹魏는 한반도 동북부 일대에 넓게 형성된 고구려 세력권의 철저한 붕괴를 도모하려 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곧 한반도 동북부 일대에서 고구려의 영향력을 분쇄시켜야만 낙랑군과 대방군을 안전히 확보할 수 있다는 曹魏와 유주자사 관구검의 전략적 판단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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